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때, 하나님의 때를 기다림
하나님의 때를 기다림 속에서 같은 문장을 아홉 해 동안 기도한다는 것은 긴 일이다.
그 기다림의 한가운데 있다면 누군가 이미 성경 구절 목록을 건넸을 것이다. 이사야 40:31, 시편 27:14, 기다리고 또 기다리라는 말씀들이다. 마치 기다린다는 말이 얼굴에 온화한 표정을 띤 채 가만히 앉아 있으라는 뜻인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성경이 실제로 쓰는 히브리어에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일은 고요함보다 긴장에 가깝다. 새벽 네 시 성벽 위의 파수꾼, 두 절에서 어느 때까지를 네 번 묻는 시편 기자, 자기 초소에서 답을 요구하는 예언자와 같다. 성경에서 가장 오래 기다린 사람들은 그 기다림을 조용히 겪지 않았다.
이 글은 당신의 기다림이 왜 이렇게 오래 걸리는지 말해 주지 않을 것이다. 성경이 매끈한 해답으로 정리하기를 거부하는 지점까지만 함께 간다.
하나의 영어 단어 아래 놓인 세 히브리어 동사
오래 기다리다 보면 언젠가 누군가는 기다리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가 문자 그대로 꼬인 줄을 뜻한다고 말한다. 당신이 팽팽히 당겨지는 밧줄이라는 것이다. 그 동사는 유명한 이사야 40:31의 카바(qavah)다. 코웨 YHWH(qōwê YHWH), 곧 여호와를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줄이라는 이야기도 완전히 지어낸 것은 아니다. 소망을 뜻하는 일상적인 히브리어 명사 티크바(tiqvah)가 그 어근에서 자라며, 여호수아 2:18에서 라합이 창문으로 내려뜨린 붉은 줄도 티크바다.
그러나 걸리는 점이 있다. Brown-Driver-Briggs는 이 어근 아래 하나가 아니라 두 항목을 싣는다. 기다리다라는 동사와 모으다라는 별개의 동사다. 하나의 생각 안에 그림이 든 것이 아니라 서로 닮은 두 말이다. Strong's는 둘을 한데 묶었고 밧줄 이야기는 거기서 나왔다. 카바가 앞으로 몸을 기울이는 듯한 기다림이라는 점은 맞다. 하지만 줄이라는 그림은 불확실하며, 감당할 수 있는 것보다 많은 뜻을 맡고 있다.
시편 130:5에서 둘째 동사 야할(yachal)은 사람보다 한 문장을 향한다. “나 곧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 기다림에는 카바를 두 번 쓰고, 소망에는 야할을 쓴다. 이 구절에서 붙드는 대상은 이미 주어진 말씀이다. 다른 곳에서 야할은 단순히 기다리거나 소망한다는 뜻일 수도 있다. 다음 줄은 그 영혼을 아침을 기다리는 파수꾼 곁에 둔다.
셋째 하카(chakah)는 하박국이 응답에서 받는 말이다. 사전들은 기다리다, 기대하다, 지체하다는 뜻을 분명하게 제시한다. Strong's는 “달라붙다”라는 뜻도 보태지만 Brown-Driver-Briggs와 HALOT에는 없으므로, 방금 카바에 적용한 기준에 따라 여기서도 쓰지 않는다.
그러므로 차이는 자음 속에 묻혀 있지 않다. 각 동사가 무엇을 향하며 어떤 장면 속에 놓이는가가 차이를 만든다. 날이 밝기까지 시간을 세는 잠 못 드는 영혼, 초소를 떠날 수 없는 보초, 논쟁하려고 망대에 오른 예언자다. 그 누구도 가만히 앉아 있지 않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림, 하박국이 실제로 보여 준 모습
하박국은 온화하지 않은 항의로 책을 연다. 어느 때까지 내가 부르짖어야 주께서 들으시겠습니까? 그러고는 자리를 잡는다.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 하박국 2:1. 성벽 위에서 팔짱을 끼고,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 요구한 응답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사람이다.
시편 13편도 두 절에서 같은 일을 네 번 한다. 아드 아나(ad-anah), 어느 때까지라는 말을 첫 절에 두 번, 둘째 절에 두 번 쓴다. 그 시는 수집되고 보존되고 곡조를 얻어 지휘자에게 넘겨졌다.
믿음의 일탈이 아니다. 예배의 언어였다.
하박국이 받은 응답은 사람들이 기다리는 이에게 인용하는 구절이다.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 하박국 2:3. “정한 때” 뒤의 말은 모에드(mo'ed)이며, 레위기 23장의 절기 목록을 이끄는 용어다. 시간에 관해 성경이 말하는 것에서 자세히 풀듯, 위로의 단어이기 전에 일정을 가리키는 단어다.
늦음을 나타내는 히브리어 두 단어가 그 문장 안에 함께 있다. 이트마흐마(yitmahmah)는 오래 머문다는 뜻이고, 예아헤르(ye'acher)는 정한 시각 뒤에 도착한다는 뜻이다. 구절은 첫째는 인정하고 둘째는 부정한다. 오래 머물 수는 있지만 늦지는 않는다.
다만 이 위로에는 한계가 있다. 보이지 않는 모에드는 날짜가 전혀 없는 것과 구별하기 어렵다. 하박국은 약속은 받았지만 연도는 받지 못했다. 하나님이 그 간격을 당신과 같은 방식으로 경험하시는지는 하나님이 시간 밖에 계시는가에서 따로 다룬다.
예수께서 계시던 곳에 머무신 이틀
베다니의 자매들은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이가 병들었다고 전한다. 요한의 다음 문장은 분명히 말한다. 예수께서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셨다. 이어 6절은 이렇게 말한다.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그러므로.
사랑과 지연이 그 접속사에 함께 걸려 있다. 예수는 일부러 머무신다. 요한은 장소를 말하지 않지만, 10:40은 보통 요단강 건너편, 하루쯤 걸리는 곳에 계셨다는 뜻으로 읽힌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 가는데도 머무셨다. 도착했을 때 나사로는 무덤에 있은 지 나흘이었다(요한복음 11:17). 마르다는 기다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외울 듯한 말로 맞는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는 마르다를 바로잡지 않는다. 이틀의 이유도 설명하지 않는다. 나사로를 어디 두었는지 물으신 뒤, 곧 비우실 무덤 앞에서 우신다.
그 지연이 무엇을 위한 것이었든 감정이 없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여러 해를 기다리고도 아무것도 받지 못했을 때
이 주제를 다루는 글 대부분이 조금씩 거짓말하기 시작하는 곳이 여기다. 우리는 그러지 말자.
아브라함은 일흔다섯에 약속을 받고 백 살에 이삭을 안는다(창세기 12:4; 21:5). 요셉은 바로의 술 맡은 관원에게 꿈을 풀어 주고 자기를 기억해 달라는 것만 부탁한다. 그러나 그 장은 관원이 요셉을 잊었다는 말로 끝난다(창세기 40:23). 바로 다음 절은 “만 이 년 후에”라는 말로 시작한다(창세기 41:1). 한 사람이 잊었기 때문에 감옥에서 다시 꼬박 이 년을 보냈다.
그리고 히브리서 11:13은 이렇게 말한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다시 읽어 보라. 믿음을 칭찬하려고 쓴 장은 평생 기다리다가 그 일을 얻지 못한 사람을 위한 범주를 남긴다. 각주도 예외도 아니라 명예 명단 한가운데 있는 한 절이다. 그 범주에 있다는 사실은 믿음을 잘못 실천했다는 증거가 아니다.
구약과 신약 사이의 간격도 여기에 놓인다. 흔히 사백 년의 침묵이라고 요약하지만 사백 년은 반올림한 수이고 침묵이라는 말은 틀리다. 사람들은 내내 글을 썼다. 에녹의 천문서, 희년서, 훗날 쿰란 근처에서 발견된 두루마리들이 그 기간에 나왔다. 공동체들은 시간을 세고 정한 때를 지켰지만, 하늘에서 그 가운데 무엇을 인정했다는 확인은 없었다. 그 계산법이 성전 자체의 것이었는지는 여전히 학자들이 따져 보는 문제이며 Day 4는 판정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명백한 침묵 속에서도 시간을 지킨다는 그림으로는 이보다 나은 것을 찾기 어렵다.
왜 기다려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같은 성경을 읽는 진지한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다른 결론에 이른다. 어떤 이들은 지연이 사람을 빚는 과정, 곧 응답을 감당할 사람으로 만들어지는 시간이라고 본다. 어떤 이들은 그것이 당신에 관한 일이 전혀 아니라고 본다. 또 어떤 이들은 기다림의 상당 부분이 계획된 교훈이 아니라 망가진 세상의 마찰이라고 본다. 어느 견해든 끝까지 밀어붙이면 잔인해진다. 당신은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 당신의 슬픔은 반올림 오차일 뿐이다, 아무도 이끌고 있지 않다는 말이 된다. Day 4는 이 가운데 하나를 택하지 않으며, 당신이 앉은 자리에 앉아 보지 않은 사람도 그래서는 안 된다. 그리고 이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인용되는 전도서도 포스터에 적힌 뜻보다 훨씬 좁은 주장을 한다.
그러면 할 수 있는 일이 있는가
자기계발 블로그가 아니라 본문에서 가져온 세 가지가 있다.
적어 두라. 하나님이 하박국의 항의 뒤에 처음 내리신 지시는 기록 업무였다.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 하박국 2:2. 쪽에 날짜를 적어 두라. 기억은 무엇을 언제 구했는지 몰래 고쳐 쓰며, 여섯째 해가 되면 격려보다 그 기록이 더 필요할 것이다.
참된 내용을 소리 내어 말하라. 시편 13편은 여섯 절 안에서 네 번의 어느 때까지에서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로 간다. 앞의 네 번이 없었던 척하지 않는다. 노래는 항의를 바로잡지 않고 같은 하나님을 향해 그 뒤를 따른다.
리듬을 지키라. 파수꾼이 해를 뜨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있어야 할 시각에 자기 초소에 서 있다. 안식일과 기도 시간과 일상의 정해진 일들은 삶에서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을 때에도 한결같이 이어진다.
Day 4가 지키는 달력에는 이를 보여 주는 작은 이미지가 있다. 거룩한 해는 364일을 센다. 나머지 없이 정확히 52주다. 그러고는 계산이 멈춘다. 삼월 춘분이 1일을 다시 고정할 때까지, Waiting Space라는 하루나 이틀의 세지 않는 날이 연말에 서 있다. 거룩한 주간은 그날들을 통과하지 않는다. 문턱에서 자리를 지키다가 멈춘 곳에서 다시 이어진다. 원하는 의미를 읽어도 좋지만, 이것은 치료법이 아니라 이미지다. 앱은 누구도 기다림을 잘 견디게 해 줄 수 없다.
자주 묻는 질문
성경에서 주님을 기다린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요?
영어가 한 단어를 쓰는 자리에 히브리어는 세 동사를 쓴다. 카바(이사야 40:31)는 기대를 품은 기다림이며, 히브리어의 소망을 뜻하는 명사 티크바를 낳는다. 시편 130:5에서 야할은 이미 주어진 말씀을 향하지만, 이는 그 구절의 문장 구조이지 어디서나 통하는 동사의 정의가 아니다. 하카(하박국 2:3)는 가장 단순하며 사전에는 기다리다 또는 지체하다고 적혀 있다. 긴장은 단어가 아니라 망대에서 응답을 받을 때까지 내려오지 않는 예언자의 장면에서 생긴다. 셋 가운데 어느 것도 조용히 앉아 막연히 바라는 그림은 아니다.
하나님은 왜 우리를 그렇게 오래 기다리게 하시나요?
성경은 어떤 경우에는 이유를 주고 다른 경우에는 주지 않는다. 하박국은 정한 때가 있다는 말은 듣지만 연도는 듣지 못한다. 예수는 마르다에게 이틀의 이유를 설명하지 않는다. 아무리 친절한 말이라도 당신의 지연 이유를 안다고 말하는 사람은 추측하는 것이다. 성경이 질문을 열어 두므로 당신도 열어 둘 수 있다.
여러 해를 기다렸는데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지금 가진 말로 하나님께 정직한 내용을 말하라. 시편 13편은 허락과 어휘를 함께 준다. 무엇을 구했는지 날짜와 함께 기록하라. 감정이 형태를 유지하지 못할 때 일상의 리듬이 형태를 붙들어 주므로 계속 지키라. 그리고 히브리서 11:13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성경에는 기다리고도 받지 못한 사람을 위한 범주가 있으며, 그들을 신실하다고 부른다.
기다림은 수동적인가요, 아니면 내가 해야 할 일이 있나요?
수동적이지 않다. 하박국은 망대에 자리를 잡는다. 파수꾼은 자기 경계를 지킨다. 시편 기자는 아무것도 나아지기 전에 노래한다. 그러나 능동적으로 기다리는 일은 기다림을 줄이는 기술이 아니다. 그렇게 여기면 기도가 지렛대가 된다. 당신은 장치를 작동하는 사람이 아니라 초소를 지키는 사람이다.
마지막 줄에 이르러도 시편 13편의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시인이 끝맺을 때에도 여전히 기다리고 있다. 다만 침묵하며 기다리지는 않는다. 긴 기다림 한가운데 있다면, 그것은 오래되었고 제법 시끄러운 동행이다. 실제로 느끼는 것을 가서 말하라. 그런 다음 오늘이 무슨 날인지 보라. 날짜를 계속 세든 세지 않는 날들에서 멈추든, 그 계산은 줄곧 당신의 자리를 지켜 왔다.